한국은행 담보채권, 왜 '녹색'보다 '화석연료'에 유리할까? 그린워싱 논란의 실체
들어가며: 중앙은행 담보 제도가 '탄소중립'과 엇갈리는 이유
정부는 연일 녹색금융 확대를 강조하지만, 정작 한국은행의 채권 담보 시스템은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시중은행이 한국은행에 맡기는 담보 채권 중 절반 넘게가 화석연료·고탄소 업종에서 발행된 채권이었고, 친환경 사업 자금 조달을 위한 녹색채권은 전체의 2%에 불과했습니다.
이 내용은 기후·환경 분야 연구기관인 녹색전환연구소와 영국 런던 소재 국제 싱크탱크 포지티브머니(Positive Money)가 공동으로 진행한 분석에서 확인됐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정태호 의원실이 한국은행으로부터 확보한 자료를 바탕으로, 총 1,368개 채권을 대상으로 조사가 이뤄졌습니다.
담보 채권 구성, 숫자로 보면 이렇습니다
한국은행은 금융기관에 유동성을 공급하거나 결제 리스크를 관리할 때, 회사채·공공기관채 등을 담보로 받아둡니다. 지난해 말 기준 이렇게 인정된 담보 총액은 168조 2,000억 원에 달합니다.
연구팀은 이 가운데 탄소배출 특성 확인이 가능한 기업·공공기관 채권 23조 원 규모를 뽑아 다음 네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화석연료 채권: 석유·LNG 등 화석연료 관련 사업으로 수익을 내는 발행 주체의 채권
탄소 고배출 채권: 철강·화학·금속 등 탄소 배출량이 많은 업종의 채권
녹색채권: 친환경 사업 자금 조달 목적의 채권 (지속가능채권 포함)
중립 채권: 위 세 범주에 속하지 않는 채권
분석 결과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구분 비중 탄소 고배출 채권 33% 화석연료 채권 20% 중립 채권 45% 녹색채권 2%
화석연료·고탄소 채권을 합치면 전체 담보의 53%를 차지하는 반면, 녹색채권은 단 2%에 그친 셈입니다.
4년 사이 정반대로 벌어진 격차
더 눈에 띄는 건 추세입니다. 최근 5년 사이 회사채·공공기관채 담보 규모 자체는 빠르게 늘었지만, 그 수혜는 화석연료 부문에 쏠렸습니다.
화석연료 채권 비중: 2021년 9% → 2025년 20% (2배 이상 증가)
녹색채권 비중: 2021년 4% → 2025년 2% (절반으로 축소)
같은 기간 정부의 탄소중립 정책 기조는 오히려 강화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은행 담보 시스템의 흐름과는 상당한 온도차가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특히 한국전력과 한국가스공사, 두 공기업이 발행한 채권만으로 전체 담보의 18%를 차지했습니다. 문제는 이들의 사업 구조가 여전히 화석연료 중심이라는 점입니다. 2024년 기준 한국전력과 발전 자회사들의 화석연료 발전 비중은 63.4%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발행량 문제가 아니다: 녹색채권 시장 대비 담보 활용률도 낮아
혹시 녹색채권 자체의 발행량이 워낙 적어서 생긴 착시는 아닐까요? 데이터를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해 기준 국내 전체 채권 상장잔액은 2,908조 원이며, 이 중 녹색채권은 약 28조 5,000억 원으로 전체 채권 시장의 1% 수준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한국은행 담보에서 녹색채권이 차지하는 비중은 0.41%에 불과합니다. 즉, 채권 시장 전체에서의 비중과 비교해도 담보로는 절반 이하 수준밖에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셈입니다.
핵심 원인: 녹색채권에만 유독 높은 '담보 할인율'
이 같은 쏠림 현상의 핵심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이 바로 '담보 할인율(헤어컷)'입니다.
금융기관이 채권을 한국은행에 담보로 맡기면, 채권 종류·신용등급·만기 등에 따라 시장가치에서 일정 비율을 할인해 담보가치를 산정합니다. 이 할인율이 높을수록 같은 금액의 채권이라도 실제로 인정받는 가치는 줄어듭니다.
2025년 기준 녹색채권의 할인율은 8.7%로, 전체 채권 평균(4.3%)의 정확히 두 배 수준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액면가 100만 원짜리 채권을 담보로 맡길 경우, 일반 채권은 95만 7,000원의 가치를 인정받지만 녹색채권은 91만 3,000원만 인정받는 구조입니다.
이 격차는 최근 들어 빠르게 벌어졌습니다.
2022년: 녹색채권과 전체 채권 할인율 모두 3.9% (격차 없음)
2023년: 녹색채권 할인율 6.7%
2024년: 녹색채권 할인율 5.7%
2025년: 녹색채권 할인율 8.7%로 급등
한국은행 측은 이에 대해, 발전 공기업 채권은 발행 규모가 크고 신용도가 높아 은행들이 대거 매입한 뒤 이를 담보로 다시 맡기는 경우가 많은 반면, 녹색채권은 주로 일반 기업이 발행하다 보니 공공기관채보다 안정성이 낮게 평가돼 할인율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 중요한가: 담보 인정이 만드는 '보이지 않는 신호'
중앙은행 담보로 인정된다는 것은 단순한 행정 절차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담보로 활용 가능한 자산은 유동성이 높아지고, 그만큼 발행 비용(조달 금리)이 낮아지는 효과를 얻습니다. 결과적으로 화석연료·고탄소 업종은 상대적으로 낮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됩니다.
전문가들은 이런 구조가 금융시장 전반에 "화석연료 관련 사업에 자금을 대는 것이 상대적으로 유리하다"는 신호를 은연중에 전달할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정책적으로는 탄소중립을 지향하면서도, 실제 자금 흐름을 좌우하는 중앙은행 담보 체계는 그 반대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전문가 제언: "녹색채권, 별도 담보 카테고리로 명시해야"
녹색전환연구소 최기원 경제전환팀장은 현재 녹색채권이 2023년 담보 인정 범위 확대 과정에서 일부 포함됐을 뿐, 독립된 담보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있지는 않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녹색채권을 명확한 별도 담보 항목으로 지정해 금융시장에 분명한 정책 신호를 줄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습니다.
아울러 담보로 활용되는 채권 중 녹색·고탄소 채권의 비중과 관련 탄소배출 지표를 국제 기준에 맞춰 정기적으로 공개해야 한다는 의견도 함께 제시됐습니다.
마무리: 숫자가 말해주는 정책 엇박자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은행 담보 채권의 53%가 화석연료·고탄소 채권, 녹색채권은 2%에 불과
최근 4년간 화석연료 채권 비중은 2배 이상 증가, 녹색채권은 절반으로 감소
녹색채권에 적용되는 담보 할인율이 전체 평균의 2배 수준으로 높아 발행 유인이 낮음
전문가들은 녹색채권을 별도 담보 카테고리로 지정하고 정기적인 정보 공개가 필요하다고 제언
정부의 녹색금융 활성화 정책과 실제 자금시장의 유인 구조 사이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서는, 한국은행 담보 제도 자체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해 보입니다.
이 글은 국내 언론 보도(2026년 8월 9일자) 및 녹색전환연구소·포지티브머니(Positive Money) 공동 분석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