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디스·피치가 경고한 한국 재정: 반도체 호황 끝나면 적자 다시 커질 수 있다
국제신용평가사 피치와 무디스가 최근 한국 정부의 내년도(2027년) 예산안과 재정 상황을 점검한 뒤 비슷한 메시지를 내놨다. 반도체 호황으로 세수가 크게 늘어나면서 당장 재정수지와 국가채무 지표가 개선될 가능성이 높지만, 이 개선이 구조적인 재정 역량 강화가 아니라 일시적인 경기순환 효과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평가다. 지출이 목표를 넘기면 다시 다년간 재정 확장과 부채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도 함께 나왔다.
피치: “개선된 재정 전망은 반도체 수익 호조 지속성에 달렸다”
피치는 2027년 예산안을 두고 “당초 예상보다 강한 재정 성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AI 투자 붐에 힘입은 반도체 기업들의 높은 수익성이 세수 급증으로 이어지면서 지출 증가를 웃돌고, 이에 따라 재정적자가 축소되고 국가채무 증가 경로도 개선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피치는 관리재정수지 적자가 올해 GDP 대비 3.9%에서 내년 0.1%로 크게 줄고, 통합재정수지가 GDP 대비 1.9% 흑자를 기록할 것으로 내다봤다. 국가채무 증가 경로도 기존 피치 전망(1542조 5000억 원, GDP 대비 51.7%)보다 낮아질 가능성이 크다고 평가했다. 정부가 밝힌 내년 총지출 820조 9000억 원(올해 본예산 대비 12.8% 증가), 국세수입 584조 4000억 원(49.8% 증가), 국가채무 1519조 8000억 원(GDP 대비 48.3%) 전망을 반영한 수치다.
다만 피치는 명확한 한계를 지적했다. “개선된 재정 전망은 현재의 AI·반도체 관련 수익 호조가 얼마나 지속될지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며 “세수 증가가 비교적 소수의 산업에 집중돼 있어 기업 이익 증가세가 둔화하면 재정지표 개선이 일시적인 현상에 그칠 수 있다”고 밝혔다. 핵심 신용 이슈는 일시적인 세입 증가분을 효과적인 투자를 통해 중기 성장으로 연결할 수 있는지 여부라고 강조했다.
정부가 신설하는 미래대응기금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를 적용했다. 반도체 호황으로 늘어난 세입을 단순 지출에 쓰지 않고 생산성 향상과 성장 잠재력 제고로 이어지는 투자에 활용하면 신용도에 긍정적일 수 있지만, 실제 효과는 기금 사업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집행되고 성장률 제고로 연결되느냐에 달렸다는 평가다.
무디스: “지출 목표 초과 시 또 한 차례 재정 확장·부채 증가 가능”
무디스도 예산안이 재정 건전성과 미래 성장동력 확보 사이에서 균형을 모색한 것으로 보면서도, 실행 과정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신용도에 미치는 영향은 생산성과 성장 측면의 성과가 실제로 나타나 구조적 지출 및 부채 증가 위험을 상쇄할 수 있을지에 달려 있다”고 밝혔다.
긍정적으로 본 부분도 있다. 미래대응기금 162조 3000억 원 중 12조 5000억 원을 신규 국채 발행 축소에 배정한 점에 대해 “기금 규모에 비하면 크지 않지만, 예상 밖 세수 증가분의 일부가 전액 지출되지 않고 레버리지 억제에 사용된다는 신호라는 점에서 신용에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리스크로 “반도체 관련 세수의 경기순환적 성격”을 꼽았다. 지출이 목표를 초과할 경우 또 한 차례의 다년간 재정 확장과 부채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다. 최종적인 신용도 영향은 정부가 목표로 한 투자가 구조적 지출 증가를 상쇄할 만큼 충분한 성장과 생산성 향상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고 진단했다.
신용등급은 유지…정부는 “긍정적 평가” 강조
피치와 무디스는 올해 들어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기존 수준으로 유지했다. 피치는 1월 ‘AA-’(전망 안정적), 무디스는 2월 ‘Aa2’(전망 안정적)를 재확인했다. 한국은 피치 기준 2012년 9월, 무디스 기준 2015년 12월 이후 해당 등급을 유지하고 있다.
정부는 두 기관이 “이례적으로 내년 예산안의 재정건전성 제고 및 미래성장 투자 방향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고 밝혔다. 앞으로 주요 신용평가사와 글로벌 투자자를 대상으로 재정정책과 중장기 성장전략을 적극 설명해 나갈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핵심 정리
- 단기 긍정적 요인: 반도체·AI 호황에 따른 세수 급증으로 2027년 재정수지·국가채무 지표가 크게 개선될 전망.
- 중장기 리스크: 세수 증가가 특정 산업에 집중돼 있어 호황이 꺾이면 적자가 다시 확대될 수 있음.
- 관건: 지출을 목표 내로 관리하면서 일시적 세입을 생산성·성장 잠재력 제고 투자로 연결하는 것.
- 신용평가사 시선: 재정 개선이 ‘영구적 역량 강화’가 아닌 ‘이례적 경기순환 세수’에 의존한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지적.
반도체 사이클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정부가 늘어난 세입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따라 한국의 재정 건전성과 신용등급 전망이 달라질 수 있다. 당분간 예산 집행 실적과 세수 동향을 면밀히 지켜볼 필요가 있다.